우리가 공동체를 돌보고, 공동체가 나를 돌본다.
한겨레 신문의 칼럼리스트이고, 호스피스 완화의료 의사이며 저자이기도 한 박중철 의사의 기고문을 자주 읽는다. 항상 환자들의 마지막 삶의 과정에 관해 쓴 글들이 큰 공감을 준다. 지난 5월 8일, “죽음 앞에서 삶을 건져 올리는 것, 사랑, 가족”이라는 칼럼도 매우 인상 깊었다.
저자는 “가족은 혈연이나 애정으로 묶여 있는 운명 공동체이자, 삶의 이야기를 함께 쓰는 서사 공동체이며, 그래서 가족의 슬품은 곧 나의 슬픔이자 고통이 된다."고 말하면서, " 망가진 삶에 새롭게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은 가족뿐.”이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인간은 태어난 몸과 가족이라는 두 가지 밑천을 갖는다. 건강한 몸과 사랑을 주는 가족은 자존감의 중요한 두 축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태어났더니 이미 건강한 몸이 아닐 때도 있다. 그리고 "가족은 죽어가는 나일지라도 내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거두지 않는다"는 저자의 말처럼, 건강하게 태어났거나, 혹은 그렇지 못하고 태어난 나일지라도 오롯이 가족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로 나에 대한 돌봄을 시작한다.
사랑과 돌봄은 우리에게 삶의 저주를 풀고 다시 살아가는 이유이기도 하며 긍정의 힘을 준다. 인간은 태어난 순간, 그리고 그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어느 한순간도 인간이 아니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우리는 나이가 들어 노년에 들어섰음에도 "노인은 시민이다"라고 외치면서 인간으로 당당하게 살아가기를 실천한다.
저자는 70대의 어머니가 40년 넘게 뇌종양 아들을 간병하며 살았다는 사례도 전하고 있다. 갓난아기 시절부터 아팠던 아들의 치유를 바라며, 자신은 어느새 70대 노인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결국 아들은 식물인간 상태에 이르렀다는 내용이다. 저자는 그 어머니의 앙상한 몸과 깊이 팬 얼굴의 주름이 그가 겪고 살아온 삶의 피로와 절망의 크기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적고 있다. 그러면서 저자는 가족은 운명 공동체이기에 개인의 비극이 가족의 비극이기도 하다고 전한다. 온갖 노력에도 악화, 고통, 죽음을 막아내지 못한 무력감으로 가족들의 삶마저 무너뜨리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가족들의 삶을 무너뜨리는 것은 또 있다.
바로 경제적 어려움으로 삶을 더 쉽게 지치게 만든다.
그런데 가족들의 삶을 무너뜨리는 것은 또 있다. 바로 경제적 어려움으로 삶을 더 쉽게 지치게 만든다. 이 대목에서 환자의 삶과 가족의 삶이 서로 갈등처럼 교차하기도 한다. 70대 어머니는 아들 곁에 계속 있는 것이 이제 두려워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살아 있는 이에게 해결하지 못하는, 지켜주지 못하는 무력감으로 자신의 삶조차 무너져 내리기 때문이다.
어쨌든 가족에게는 사랑이 있어 환자는 가족과 사랑을 통해서 죽음의 공포와 허무함으로 상쇄할 수 있음은 틀림없다. 또한 분명한 점은 사랑이 환자의 무력함을 이기는 데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환자의 상태로 인하여 일어날 수 있는 가족의 경제적인 부담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생의 마지막에 이르러 좋은 죽음을 맞이하고, 가족과 지인들의 한없는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사회적 경제적 여건이 마련되어야 한다. 환자가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남아서는 안 된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공동체의 현실은 기대하고 생각하는 것과는 거리가 너무 멀기만 하다. 예를 들어 임종이라는 생애 마지막 상황에서도 새로운 미래는 있을 수 있고 행복을 맛볼 기회는 충분하다. 약간의 의학적 도움과 가족과 지인의 사랑, 그리고 한 가지 더 필요한 것은 좋은 생을 마무리할 수 있는 사회, 경제적 여건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공동체 돌봄은 돌봄이 상호 호혜적 관계에서 모두가 참여하는 평등한 돌봄
이제 가족만이 아닌 관계나 구조 속의 내가 공동체를 돌보고, 그 공동체가 다시 나를 돌본다.
좋은 삶을 살고 죽음을 맞이하는 데에 필요한 사회 경제적 여건을 만드는 일이 공동체 돌봄이다. 공동체 돌봄은 돌봄이 상호 호혜적 관계에서 모두가 참여하는 평등한 돌봄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필요한 법과 제도를 마련하고 돌봄이 온전히 실천되도록 하는 데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 경제적 뒷받침이다. 이제 가족만이 아닌 관계나 구조 속의 내가 공동체를 돌보는 것이고, 그 공동체가 다시 나를 돌보도록 해야 한다.
40여 년 간 가족이 오롯이 돌봄을 감당하는 가족 간병 돌봄은 가족의 사랑마저 지치게 만들고 흔들릴 수밖에 없다. 이제는 공동체의 상호 돌봄이 되도록 먼저 공동체를 돌봐야 할 때이다. 공동체를 먼저 돌보는 것은 시민이다. 시민으로서 인간으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실천 방법이 요구될 때다.
그리고 한국인의 가장 소중한 삶의 가치는 1순위 돈, 2순위 자신의 건강, 가족은 세 번째라고 한다. 이는 젊고 건강할 때, 내 능력으로 활동할 때, 내 삶은 행복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대한 돈을 모아 젊어지는 데 열심히 쏟아붓다 보니 노화, 노년, 노인은 혐오의 대상이 되기 쉽다.
그런데 최소한의 돈 문제만 해결된다면 좀 더 보람 있는 일을 할 수도 있고, 죽음 앞에서도 당당해질 수도 있으며, 가족이나 지인의 헌신이 아닌 사랑을 얼마든지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 가족이 죽음 앞에 있는 삶의 의미를 채워줄 수 있다는 점에 공감하면서도 한 가지 더 필요한 것은, 이런 사랑이 충분히 주어지도록 하려면 사회적 경제적 여건이 공동체로부터 주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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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시민뉴스 = 진상진 기자(coogl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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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공동체를 돌보고, 공동체가 나를 돌본다.
한겨레 신문의 칼럼리스트이고, 호스피스 완화의료 의사이며 저자이기도 한 박중철 의사의 기고문을 자주 읽는다. 항상 환자들의 마지막 삶의 과정에 관해 쓴 글들이 큰 공감을 준다. 지난 5월 8일, “죽음 앞에서 삶을 건져 올리는 것, 사랑, 가족”이라는 칼럼도 매우 인상 깊었다.
저자는 “가족은 혈연이나 애정으로 묶여 있는 운명 공동체이자, 삶의 이야기를 함께 쓰는 서사 공동체이며, 그래서 가족의 슬품은 곧 나의 슬픔이자 고통이 된다."고 말하면서, " 망가진 삶에 새롭게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은 가족뿐.”이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인간은 태어난 몸과 가족이라는 두 가지 밑천을 갖는다. 건강한 몸과 사랑을 주는 가족은 자존감의 중요한 두 축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태어났더니 이미 건강한 몸이 아닐 때도 있다. 그리고 "가족은 죽어가는 나일지라도 내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거두지 않는다"는 저자의 말처럼, 건강하게 태어났거나, 혹은 그렇지 못하고 태어난 나일지라도 오롯이 가족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로 나에 대한 돌봄을 시작한다.
사랑과 돌봄은 우리에게 삶의 저주를 풀고 다시 살아가는 이유이기도 하며 긍정의 힘을 준다. 인간은 태어난 순간, 그리고 그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어느 한순간도 인간이 아니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우리는 나이가 들어 노년에 들어섰음에도 "노인은 시민이다"라고 외치면서 인간으로 당당하게 살아가기를 실천한다.
저자는 70대의 어머니가 40년 넘게 뇌종양 아들을 간병하며 살았다는 사례도 전하고 있다. 갓난아기 시절부터 아팠던 아들의 치유를 바라며, 자신은 어느새 70대 노인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결국 아들은 식물인간 상태에 이르렀다는 내용이다. 저자는 그 어머니의 앙상한 몸과 깊이 팬 얼굴의 주름이 그가 겪고 살아온 삶의 피로와 절망의 크기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적고 있다. 그러면서 저자는 가족은 운명 공동체이기에 개인의 비극이 가족의 비극이기도 하다고 전한다. 온갖 노력에도 악화, 고통, 죽음을 막아내지 못한 무력감으로 가족들의 삶마저 무너뜨리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가족들의 삶을 무너뜨리는 것은 또 있다.
바로 경제적 어려움으로 삶을 더 쉽게 지치게 만든다.
그런데 가족들의 삶을 무너뜨리는 것은 또 있다. 바로 경제적 어려움으로 삶을 더 쉽게 지치게 만든다. 이 대목에서 환자의 삶과 가족의 삶이 서로 갈등처럼 교차하기도 한다. 70대 어머니는 아들 곁에 계속 있는 것이 이제 두려워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살아 있는 이에게 해결하지 못하는, 지켜주지 못하는 무력감으로 자신의 삶조차 무너져 내리기 때문이다.
어쨌든 가족에게는 사랑이 있어 환자는 가족과 사랑을 통해서 죽음의 공포와 허무함으로 상쇄할 수 있음은 틀림없다. 또한 분명한 점은 사랑이 환자의 무력함을 이기는 데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환자의 상태로 인하여 일어날 수 있는 가족의 경제적인 부담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생의 마지막에 이르러 좋은 죽음을 맞이하고, 가족과 지인들의 한없는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사회적 경제적 여건이 마련되어야 한다. 환자가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남아서는 안 된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공동체의 현실은 기대하고 생각하는 것과는 거리가 너무 멀기만 하다. 예를 들어 임종이라는 생애 마지막 상황에서도 새로운 미래는 있을 수 있고 행복을 맛볼 기회는 충분하다. 약간의 의학적 도움과 가족과 지인의 사랑, 그리고 한 가지 더 필요한 것은 좋은 생을 마무리할 수 있는 사회, 경제적 여건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공동체 돌봄은 돌봄이 상호 호혜적 관계에서 모두가 참여하는 평등한 돌봄
이제 가족만이 아닌 관계나 구조 속의 내가 공동체를 돌보고, 그 공동체가 다시 나를 돌본다.
좋은 삶을 살고 죽음을 맞이하는 데에 필요한 사회 경제적 여건을 만드는 일이 공동체 돌봄이다. 공동체 돌봄은 돌봄이 상호 호혜적 관계에서 모두가 참여하는 평등한 돌봄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필요한 법과 제도를 마련하고 돌봄이 온전히 실천되도록 하는 데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 경제적 뒷받침이다. 이제 가족만이 아닌 관계나 구조 속의 내가 공동체를 돌보는 것이고, 그 공동체가 다시 나를 돌보도록 해야 한다.
40여 년 간 가족이 오롯이 돌봄을 감당하는 가족 간병 돌봄은 가족의 사랑마저 지치게 만들고 흔들릴 수밖에 없다. 이제는 공동체의 상호 돌봄이 되도록 먼저 공동체를 돌봐야 할 때이다. 공동체를 먼저 돌보는 것은 시민이다. 시민으로서 인간으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실천 방법이 요구될 때다.
그리고 한국인의 가장 소중한 삶의 가치는 1순위 돈, 2순위 자신의 건강, 가족은 세 번째라고 한다. 이는 젊고 건강할 때, 내 능력으로 활동할 때, 내 삶은 행복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대한 돈을 모아 젊어지는 데 열심히 쏟아붓다 보니 노화, 노년, 노인은 혐오의 대상이 되기 쉽다.
그런데 최소한의 돈 문제만 해결된다면 좀 더 보람 있는 일을 할 수도 있고, 죽음 앞에서도 당당해질 수도 있으며, 가족이나 지인의 헌신이 아닌 사랑을 얼마든지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 가족이 죽음 앞에 있는 삶의 의미를 채워줄 수 있다는 점에 공감하면서도 한 가지 더 필요한 것은, 이런 사랑이 충분히 주어지도록 하려면 사회적 경제적 여건이 공동체로부터 주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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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시민뉴스 = 진상진 기자(coogl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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