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의 문제는 활동하고 있는 성인들 문제이다.

진상진
2025-09-28
조회수 299





아름다운 노인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누구나 아름다운 노인으로 삶을 꿈꾼다. 그러나 그들은 소수이다.



보부아르의 저서 '노년' 




며칠 전 매일경제신문의 [필동정담]에 ‘아름다운 노인’이라는 제목의 최재원 기자님의 글을 보았다. 그러면서 아름다운 노인은 어떤 노인일까? 나도 할 수만 있다면 아름다운 노인으로 늙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아름다운 노인으로 살 수 없을 것 같다.

 

아름다운 노인은 대체로 이러이러한 사람들이다. 카페에서 차 마시며 큰 소리로 떠들다가 그것이 민폐라고 생각하고 조용히 떠나는 사람, 지하철 경로우대를 출퇴근 시간만이라도 없애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 이중근 대한노인회장의 말처럼 노인들이 욕심을 줄이고 청년층을 배려하고, 존중받고 공존하려고 하는 사람이다. 상대적으로 경제적 여유를 가진 사람이어야 하고, 다른 세대를 품어 사회적 갈등이 완화 시킬 수 있다는 이유에서이다. 


반대로 아름다운 노인에 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본인 주장만 강하고 남의 입장은 잘 배려하지 않는 사람, 공공장소에서 자기 손주는 뛰어다녀도 예쁘다고 하지만 남의 집 아이가 뛰면 이내 시끄럽다고 타박하는 어른들은 아름다운 노인이 될 수 없다. 

 

그런데 기자님의 글을 읽으면서 왠지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새벽 3시에 버스를 타고 일하러 가는 노인들, 지하철 첫차를 타고 출근해 건물 청소나 관리 등 오늘도 일해야만 노인들에게는 아름다운 노인이 될 기회는 없을 터니 말이다. OECD 경제 대국이면서 노인 빈곤율 1위의 나라, 기초연금 34만 원으로는 생존조차 어려워 일터로 나가야만 하는 40%의 노인들, 그러다 보니 노인 자살률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나라의 노인들에게도 ‘아름다운 노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까 싶다. 우리나라는 노년에 필요한 빵과 장미가 없기때문이다.


그리고 자기주장만 한다거나, 남의 입장을 배려하지 않는다거나, 남의 아이가 시끄럽다고 타박하는 것은 나이 든 노인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러한 행동과 성품을 지닌 것은 그 사람의 개인적 특징일 뿐이다. 이는 노인에게만 아니라 누구에게나 해당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도 노인을 뭉뚱그려 노인들이 다 그렇다고 말하는 것은 노인들에게 조악한 동질성을 강요하는 것이다.  또한 이는 ‘연령 차별주의’이고 노인 혐오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스스로가 연령 차별주의자인지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만일 젊은 사람이 대낮에 길에서 술 먹고 고래고래 소리지르면 모든 젊은이는 다 그렇다고 탓하지 않는 것처럼 노인의 개별적인 특징만을 보고 모든 노인이 다 그렇다고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인간은 존재론적으로 모두 나이가 들면 노인이 된다. 그중에는 경제적 여유가 있어 ‘지갑은 열 돼 입은 닫는' 소위 말하는 지혜로워야만 하는 어르신, Know人’도 있겠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워 생존을 위해서는 그날그날 벌어 살아야만 하는 비존재인 No人, 늙은이도 있음이 사실이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 모두 이래저래 해야 한다고 노인에게 굴레를 씌우는 것은 연령 차별주의이다.

 

우리는 나이 든 보통 사람들에게 특정한 나이에 이르렀으니 그 나이에 걸맞은 걸 해야 한다고 강요하고 있지는 않는지, 아니면 역할 없는 역할의 굴레를 덮어씌우고 있지는 않는지 되돌아봐야 한다. 노년이 되었을 때, 인간으로서 시민으로서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보부아르가 “우리 사회의 노인정책은 수치스러울 정도다. 그러나 더욱더 수치스러운 것은 우리 사회 대부분의 청년기와 장년기가 노년을 대하는 대우이다. 우리 사회는 그들의 말년에 그들의 몫이 훼손되는 비참한 조건을 그들이 미리부터 만들고 있다”라고 지적했던 의미를 짚어봐야 한다. 노년의 문제는 활동하고 있는 성인들 문제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일이다.



한눈에 보는 선배시민사회 주간 이슈!
매주 금요일

Senior Citizens News를 메일로 만나보세요.